[베이즈X치루트] timidness(7)
베이루트 현대 AU[Timidness] W.by gulmang
해가 유독 더워지고, 나무에 지는 그림자가 무성해져감에 따라 베이즈의 방문은 더욱 잦아졌다. 무슨 요일이던지 그가 원하는 날에는 찾아왔고 아니면 말았다. '아닌 날'은 없는 편이었기에 베이즈는 거의 매일 고아원에 들락거렸다. 어느 날 그가 치루트에게 떠들어 대기로는, 집사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그 혼자 꼭두새벽에 집을 나와 꽤나 먼 거리를 걸어서 왔다고 했다. 저녁에 저택으로 돌아오는 계모에게 들키지 않게 다녀야만 한다나.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 귀로 흘러들어오면 치루트는 손가락을 책갈피삼아 끼우고 책을 덮었다. 그는 항상 별 다른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아무 말 없이 베이즈에게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그가 가끔 가다 살풋 웃고 뻐근한 몸을 쭉 펴며 나무 밑동에 기대는 모습은 베이즈에게 어느새 황홀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베이즈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필요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도 않았다.
어느덧 그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기어왔지만 다음 날을 기약하며 그것을 작은 발길질로 떨쳐내버리고, 베이즈는 그 하루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때까지 ‘유토피아’, ‘위대한 개츠비’, ‘일리아스’, ‘톰 소여의 모험’, 말할 만큼 다 말 했잖아.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면서 어떻게 내가 말 하는 것만 빼고 읽었다는 거야? 설명 좀 해보시지? 일부러 안 읽은 척 하는거 다 봤어.”
베이즈는 장난스럽게 치루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멀뚱히 그를 쳐다보던 치루트는 그가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미간을 구기며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럼 제가 읽은 책을 똑같이 읽으시던지, 도대체 왜 어쩌다가 맞지 않은걸 잡고 늘어지세요.”
“뭐?”
“억지로 접점을 만드려는 것, 그 외에도 모든게 부담스러워요, 맬버스 군. 당신은 절 이용가치 있는 무언가로 보고 다가오시는 가본데….”
“…”
“전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이 아니에요.”
그가 띄엄띄엄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되었다. 방금 뱉은 말은 잔인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알았기에, 관계를 받아들일 수 없어 남에게 상처를 남겨야 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누군가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쳐내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에 그을린 자국이 하나 더 생길 것만 같았기에 그랬다는 것이 그가 내세울 수 있었을 유일한 변명이었다.
베이즈는 잔디밭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완벽히 분노에 찬 것이 아닌 처절함이라는 것에 왠지 모르게 화가 받친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애먼 나무줄기만 세게 한 번 쳤다.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 같은 건 나한테 차고 넘치는데,” 베이즈는 성난 눈빛으로 치루트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취급하면 애초에 너를 만나러 오지 않았을 거야. 사람 하나 꼬아내서 이용하는 건 굳이 내가 직접 들러붙어서 하지 않아도 돈이면 충분하다고. 알아들어?”
“맬버스….”
“애초에 계속 밀어낸 것도 너야. 난 여기 다신 안 와. 나중에 가서 외롭다고 질질 짜지나 마시지.”
‘이게 아니야. 아니야, 난 그냥 내가 사라지면 허전할 거란 이야기나 하고 돌아설 생각이었는데.’
베이즈는 속으로 끊임없이 외쳤지만 함부로 들썩이는 입술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 말을 멈출 수 없었기에 돌아서서 달음박질 쳤다. 해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외출이 들킨다면 사과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영원히 치루트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뇌리에 몇 번이고 꽂혀 들어왔다.
쉴 틈도 없이 뛰었지만 이미 그가 도착했을 땐 저택의 높은 담 한 구석에 걸쳐놓은 줄사다리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베이즈, 숨이 차 보이는구나.”
베이즈의 계모는 담에 기대어 길고 얇은 나무 작대기를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 안녕하세요. 아줌마. …하하.”
*
베이즈는 나체로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그는 온 몸에 남은 선명한 붉은 줄들이 쓰려서 울고 싶었다. 그는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가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사별한 후 그 자리를 꿰찬 계모라는 자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서는,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은 저택의 울타리 속에 가두었다. 이유를 묻는 것에 그녀는 메마른 목소리로 ‘밖의 더러운 아이들과 너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말하고 거짓 미소를 짓곤 했다. 하지만 그의 세상이 넓었을 때 만났던 아이들―적어도 그의 눈에 비추어 지기로는― 중 더럽고 추악한 자는 하나 없었다.
계모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하수인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철창으로 얼룩진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베이즈는 문득 제 안의 무언가가 말라서 바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열두 살이었던 소년은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애원했다.
“지금은 고아원에 사는 소년 하나랑 연결시켜 줄테니, 그 애를 뒤에서 도와주렴. 열네 살 이 되면 그 아이를 만나게 해주마.”
“그 애 이름은 뭐죠?”
*
‘저 못된 인간, 분명히 내가 기절한 줄 알고 뻔뻔하게 통화하고 있는 거겠지.’
문 밖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려오자, 베이즈는 무거운 몸을 끌고 일어나 문에 귀를 댔다. 가만히 듣던 그는 다급하게 문고리를 철컥이며 쾅쾅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여보세요, 원생 치루트 임웨를 보호하는 중인 그 고아원인가요? 베이즈 맬버스의 어머니입니다. 네, 다른 게 아니고, 지원의 폭을 조금 넓히려고요.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 중에서 가장 문제아인 원생 한명을 좀 바꿔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