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박스로 ○○(티스토리 업로드이기 때문에 익명처리) 님이 같이 야자하는 고등학생 베이루트를 신청해 주셨습니다! 좋은 소재 감사드려요!
▼굴망의 리퀘스트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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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켜진 가로등의 불빛 말고는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는 캄캄한 밖은 그에게 그다지 흥미로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몰려있는 교과서를 무작정 폈다. 반듯한 글씨들이 인쇄되어있지 않은 빈 공간이라면 어디든지, 상형 문자를 그어놓은 듯한 글씨로 그의 정리가 적혀있었다. 시력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줄여야만 했기에 아마도 대강 손으로 정리하며 내용을 머리에 넣을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정렬된 책상들 중 맨 앞의 것에 앉은 치루트 임웨는 평소와 같이 렌즈를 낀 눈 위에 안경을 덧대었다. 보조 기구가 없는 채로는 책에 이마를 박듯이 바짝 붙이고 글씨를 읽어보려고 해도 한 글자도 똑바로 알아볼 수 없는 눈. 그는 시력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 비탄하며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부스럭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공기의 사이에 숨어들어있던 침묵이 달아났다. 그 소리를 경주의 신호탄으로 삼기라도 했는지, 필기구를 뒤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베이즈 맬버스는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창문 쪽으로 돌렸다. 평소라면 그 또한 얇은 책장을 넘기며 다소 흥미 없는 눈빛으로 문단들을 훑기라도 하겠지만, 오늘만은 그에게 있어 예외였다. 공부가 유독 하기 싫은 날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소년은 요즈음 들어 마주치기만 하면 진학에 대한 말들만을 잔뜩 늘어놓기 시작했다. 화가 났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이제껏 봐온 치루트는 언제나 할 일이 우선이었으며, 후에 남는 시간에야 그와 시시한 것들을 하고는 했다. 어렵고 힘든 일부터 해내야지만 그 후의 작은 즐거움도 크게 돌아온다는 것이 치루트의 변명이었지만, 글쎄, 그가 보기에는 치루트는 그와 함께하는 것 보다 공부를 더 즐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요새 나에게 관심이 있기는 하냐’를 물어보았더니 치루트는 대강 얼버무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것이 오늘의 오전이었다.
그들의 자리는 칠판과 교탁을 바로 앞에 둔 중간 줄에 있었다. 화가 덜 풀린 채로 창문 쪽으로 눈을 굴리던 베이즈의 시야에 책에 시선을 꽂고 고개 한 번 들지 않는 옆얼굴이 들어왔다.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봤는데도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고 지루함부터 들 수 있나, 베이즈는 치루트를 원망해야 할지 제 스스로를 원망해야 할지 몰랐다. 갖가지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베이즈의 눈빛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치루트는 그가 그저 어두움을 바라보고만 있는 줄로 알았다.
‘내가 이해해야지, 원. 나 없으면 저 녀석 데려갈 놈 없잖아.’
베이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옷이 쓸리는 소리에 치루트가 힐끔 그를 바라보고는 윗니를 내보이며 웃었다. 저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베이즈는 생각하며 그에 다시 웃음으로 화답했다. 치루트의 콧잔등이 꽃물을 들인 것처럼 살짝 붉어졌다. 베이즈가 쓸데 없는 생각을 했다는 건 그 표정으로 충분히 밝혀졌다.
타종 하자마자 책을 피지 않았던 탓인지, 여전히 공부는 내키지 않았다. 따분함이 멍하니 치루트를 바라보고 있던 베이즈의 눈꺼풀을 놀리듯 눌렀다가 힘을 빼기를 반복할 때마다 그는 눈을 번뜩 떴다가 다시 천천히 감았다. 감겼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제 딴에는 엎드려 잠들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었다. 오늘 감독을 맡은 교사는 손이 매웠다. 한 번 맞으면 붉고 푸르게 터진 손자국이 남는 것은 물론이요, 페달을 밟으면 피아노의 건반 음이 울리며 길게 이어지는 것처럼 아픔이 며칠은 갔다.
하지만 나름 노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결과는 크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곯아 떨어지기 직전에 그는 작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의 근원이 된 손을 눈으로 쫓으며 올라가보니 턱짓으로 앞문을 가리키며 말하는―정확히 하자면 소리보다는 입의 모양으로 말을 전달하려 했다―치루트의 얼굴이 보였다.
베이즈는 제 귀를 가리키고 손을 교차시켜 가위 자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큰 소리를 내며 공책을 찢어 책상 위에 내려놓자마자 고개를 수그리고 열중하던 몇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에 무슨 상관이냐고 답하듯 콧숨을 내고, 베이즈는 종이 위에 가지런하고 큰 글씨로 쓰인 물음을 보냈다.
“무슨 일인데.”
치루트는 종이를 제 앞으로 당겨 그가 써놓은 말을 보고는, 그 주변에다 너저분한 글씨를 눌러썼다.
‘방금 너 조는 거 보고 감독 선생님이 손짓하시던데.’
베이즈는 연필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글씨가 더 진해졌다.
‘진짜? 아니, 저 선생은 왜 꼭 나한테만 저래.’
‘아니.’
‘뭐?’
‘아니라고.’
‘그럼 뭔데.’
“거짓말이야. 그냥 졸지 말라고 해본 거란 말이지.”
치루트는 연필을 놓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다가 터져나오는 장난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푸핫, 하고 소리를 내며 우스워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베이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자 베이즈는 얼이 빠졌다. 도대체 뭐가 저렇게 재미있다는 거야, 어이가 없는지 중얼거리던 베이즈는 저도 웃음을 터트리며 큰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공부나 해, 치루트 임웨.”
그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학생들은 이제 거의 없었다. 더러는 아직도 집중하고 있었지만, 조용하게 도는 흐름을 두 사람이 막아버리자 구석 자리에서부터 점점 왁자한 소리가 번져 오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감독 교사가 반의 앞문을 말 그대로 부술 듯이 열어서 그들을 꾸짖을 것이 분명했지만, 여러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하기에는 그들이 가졌던 휴식 시간이 너무 적었다. 갖가지 고민을 넣을 공간이 더 이상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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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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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루트는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바쁘지 않은 날에는 늘 책을 읽었다. 주로 즐겨 읽는 것은 주제의 분류가 무엇이던지 소설이었는데, 그가 지난 번에 읽었던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남았던 인상적인 문장은 따로 있었지만, 그는 평범하게 읽었던 수 많은 문장들 중에서 스쳐 보내듯 읽은 한 문장을 문득 떠올렸다. ‘알버트는 생각했다. 주목 받지 않을 장소는 가장 조용한 곳과 가장 시끄러운 곳, 둘 중 하나다.’
치루트는 베이즈가 손을 빼지 못하게 온 힘을 다해 손목을 잡고 대담하게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듯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자유로운 한 손으로 치루트의 멱살을 냅다 붙잡고 흔들며, 베이즈는 얼굴을 붉혔다. 웃음이 입가에서 뜰 줄을 몰랐다.
“너, 미쳤지? 이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할거야, 어, 풍기문란 징계라고!”
“대입 준비에 나를 뺏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제대로 된 사랑의 표시를 한 거지!”
“아니거든? 그리고 사람도 많고,” 치루트는 베이즈의 말을 끊었다. “안 보고 있다고!”
“그래도.”
“사랑해!”
치루트는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더욱 과격해진 흔들림이 그의 안경을 콧잔등에서 흘러내려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다가 베이즈는 팔의 힘을 풀고 치루트와 눈을 맞췄다. 치루트는 베이즈와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눈동자의 검고 흰 색 정도는 아직 보조기구가 없어도 구분할 수 있었다.
“치루트. 눈이…”
“눈동자 색이 예전보단 많이 흐려졌지?”
그는 이어질 말을 너스레로 끊을 수도 있겠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이 부족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눈을 감아 흐려진 눈동자를 눈꺼풀 뒤로 숨긴 후에 몰려오는 비참함을 마주하고는 차라리 피하는 게 나을 뻔 했다고 생각했다.
“예쁘네. 역시.”
치루트는 눈을 뜨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베이즈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끌어당겼다. 뒤에 따르는 말을 다 듣지 않은 채로 판단하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의 축에 듦이 분명했다. 치루트는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속삭였다.
“그냥 사랑한다고 하는 게 어때?”
“쯧. 사랑해. 아니, 생각하던 거랑 말이 반대로 나왔다. 이 밉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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