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박스로 초보자의 연애를 하는 써니자룡을 신청 받았습니다! 좋은 소재 감사드려요! 어떻게 쓸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게 최선의 결과였습니다 히히. 글의 마지막 부분에 수위 부분이 짧게 존재는 하나 암호를 걸 정도인가 싶어서 일단 암호는 걸지 않았습니다. 불편하다 싶으시면 트위터로 살짝 찔러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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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말고 와요. 열두시.
나지막한 목소리가 자룡의 귓바퀴를 몇 번 돌았다. 얼떨결에 끄덕이며 받아든 것은 편지 봉투였다. 그는 급하게 지나쳐가는 써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이내 뒤돌았다. 적혀있을 것은 뻔했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주소, 그리고 몇 호실 따위의 정보를 알려줄 숫자 몇 개. 써니의 방식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어제는 그저 술김에 한 말이겠거니 하고 그는 받아넘겼다.
어젯밤 써니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 또한 써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알코올 냄새가 지독하게 올라오는데도, 얼굴이 붉은 색으로 상기된 이유가 수줍어 그런 거라고 지난밤에 그는 착각했다. 써니는 마음을 한 군데에 둘 사람이 아님을 잘 아는데도 단순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전구를 갈아 끼운 지가 꽤나 오래되어 어슴푸레해진 복도의 등 아래서 맞춘 입술이 거칠지만 따뜻했단 것은 그 혼자에게만 살아있을 기억이었다.
“우리 맏형님, 나랑 사귀어요.”
그래.
그는 써니의 입모양이 눈가에 어리는 것을 손으로 닦아냈다.
오늘은 몇 호실로 가서 먼저 씻고 있으랴, 못 된 녀석아, 자룡은 혀를 차며 중얼거리고 편지 봉투를 열었다. 어떤 영화, 어느 극장, 몇 번째 상영관, 그리고 몇째 줄 어느 자리.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반듯한 모양의 종잇조각에 적힌 것들을 읽어 내려갔다.
어제 한 말들 중에 빈 말 하나도 없어요. 조만간 말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영화 보러 가요, 우리. 데이트 하자는 소리에요.
*
검은 승용차의 앞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자룡에게 점점 뚜렷하게 다가왔다. 답답하다며 언제나 풀어헤쳐놓았던 셔츠의 단추가 끝까지 잠겨있었다. 깡패면 난폭하게 보여야죠, 하며 어깨를 으쓱이던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써니는 긴장한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신경 쓰고 나왔어?”
자룡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써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앞문을 열자마자 써니의 눈에 들어온 제 모습 또한 긴장되어있다는 것을 자룡은 몰랐다. 늘 고수하던, 몸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날 정도로 붙는 흰 민소매 티셔츠 대신에 써니가 잘 어울린다며 선물한 옷가지들을 걸치고 말끔히 면도까지 한 것이, 써니는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에서부터 올라오다 입가에 걸려 쑥스러운 웃음을 만들어냈다. 능글맞게 굴던 손짓들이 깊숙이 숨어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온 몸의 혈관이 터질 듯 피가 달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었다.
“자룡 형.”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평소라면 달려들어 장난이라도 쳤겠지만, 대답대신 자룡은 입가에 초승달을 피웠다.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다 웃으며 다가오는 써니를 바라보았다. 몸이 배배 꼬이는 것을 겨우 똑바로 다잡고, 그는 몇 걸음을 앞으로 걸어갔다.
*
스피커에서 슬픈 배경음악이 퍼져 나왔다.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눈을 둘 곳은 화면이지만, 써니는 자꾸만 자룡에게 눈을 돌렸다. 영화에 집중을 한 건지, 저도 모르게 품에 팝콘을 꽉 당겨 안기만 하고 먹지도 않는 모습이 귀여웠다. 먹다가 손이라도 닿지 않을까 싶어 사들고 온 팝콘은 완전히 뺏긴 꼴이었지만. 이따금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에 맞추어 써니도 눈물을 흘리는 척 하며, 뜨거워진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는 거 에요. 말도 안하고 무작정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말하자 시선을 앞으로만 하던 자룡이 살짝 고개를 돌려 써니를 바라보고, 그에게 손짓했다. 써니가 귀를 그에게 가까이 하자, 그가 속삭였다.
“너도 아무 말도 안하고 물고 늘어졌잖아. 사랑한다고 말부터 했어야지.”
그 때 써니는 깨달았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당겨서 열 수 있는 문은 없었다.
써니는 동의라도 구하듯 자룡의 손등을 톡 치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거친 손이 겹쳐지자 그는 단단히 깍지를 꼈다. 움찔거리던 손이 편안히 힘을 뺐다.
*
“형님, 전구 갈아줄까요?”
써니는 복도의 전등을 올려다보았다. 전날 밤에는 그냥 저가 술을 마셔서 흐리고 깜빡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줄 알았더니, 진짜로 깜빡거리고 있던 것이었다. 이정도 불빛밖에 없으면 불편 할 텐데, 하고 써니가 툭 던진 말에 자룡은 현관문에 등을 대고 기대어 대답했다.
“아냐, 별로 불편하지도 않고.”
“이러다가 완전히 빛이 없어지면 어쩌게요. 다쳐요.”
자룡은 한 동안 말이 없다가 환하게 웃었다.
“원래는 어제 전구 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깜빡거리는 복도 등에 끝내주게 멋진 추억이 생겨버렸으니까. 못 갈겠더라고.”
“다 좋지만, 다치는 건 안 돼요. 어제 새 전구 사다 놓은 거죠? 가져다 줘요, 어서.”
날벌레 수십 마리가 여름날에 불빛에 이끌려 등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대로 죽었다. 이러니까 불이 더 흐리지, 써니는 중얼거리고 자룡이 가져다준 새 전구를 끼웠다. 그러자 조명이 그들의 그림자를 명확하고 진하게 비췄다. 묘하게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자룡을 곁눈질로 살피고 나서, 써니는 복도 바깥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 건물들을 쭉 훑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럼, 밝은 복도 등에 대한 끝내주게 멋진 추억 하나 더 만드는 건 어때요.”
“뭐?”
“내 말은, 키스해도 되냐고요.”
써니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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