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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재정비 중*

[베이즈X치루트] timidness(1)


베이루트 현대 AU



[Timidness] W.by gulmang




  탁상시계가 울려대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도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다. 겨울의 오전 여섯시는 어두운 편이지. 그는 눈두덩을 한 번 문지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탁상을 더듬거리던 손이 마침내 안경을 조심스럽게 그러쥐고 그것을 얼굴 근처로 가져왔을 때, 가만히 멈춰있는 일 말고는 할 수 없었다.

 



 

  작가 치루트 임웨의 앞이 서서히 보이지 않게 된 것은, 떠나가 버린 자에게 느끼던 상실감을 펜 끝에 눌러 담아 없애버리려 마구잡이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다. 아마 좀 더 젊었을 시절의 그가 짧은 소설 한 편을 완성한 첫날 으로부터 열댓 해 쯤 지났을 테였다.

처음 시야가 흐려질 때 즈음에는 사사로운 눈병, 혹은 글을 쓰기위해 오래도록 눈을 혹사시킨 까닭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겠거니, 하며 의사에게 방문하기를 몇 년을 미루었다. 한 순간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상실감을 닦아낼 수가 없었기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문득 든 생각이다.

 

너는 언제부터 즐거움이 아니라 슬픔을 위해 글을 찍어냈는가?’



 

늦게나마 병원에 찾아갔을 때에는 시력의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진단을 전달받고 말았다. 출판으로 벌어들인 재산도 꽤나 되었지만, 넉넉한 비용의 제공을 운운하며 구차히 물고 늘어지기에는 너무 지쳐버린 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꺼낸, 희망에 대한 물음에 의사는 한 번 더 못 박아 말했다.

 

돈 만으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유도, 병명도 알 수 없다 했다. 절망감이 그의 속을 들어내어 병원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던져버렸고, 그래서 그의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못했다. 도려내진 그 안의 깊은 곳에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실패한 글이 적힌 종이처럼 구겨서 넣어놓은 무언가가 서서히 펴져 몰려왔다. 그 종이가 말하던 것은, 연락도, 소식도 끊겨버린 를 다시 만나더라도 어두운 두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치루트는 기억 속에서 다시 를 찾는 자신을 원망하며 그리움을 부정했다. 그러면서도 시력이 더 낮아지면 몇 번이고 안경의 도수를 높이고, 악화 속도를 늦추려 병원의 가능성 있는처방을 받아 잊지 않고 때를 지켜 약을 먹었다.


*

 

  그가 이 상황을 문장으로 풀어냈다면 무너져내려가고 있던 모래성의 깃발이 이내 바닥으로 누웠노라 적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뿌옇게 번졌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단순히 백사장의 모래가 흩날리는 풍경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치루트는 얼굴을 감싸고 어께를 떨었다


탁상에 뻗어 시계의 옆에 놓여있을 휴대전화를 찾던 손은 미끄러지고, 중심을 잃은 치루트는 그대로 땅으로 고꾸라졌다. 탁상 위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시계는 어느 한 부분이 망가졌는지 시끄럽게 울고, 전날 밤 마시던 물이 잔과 함께 기울어져 바닥을 적셨다. 바구니에 담겨있던 사과의 붉다란 색조차도 흐린 일렁임으로 알아볼 수 없게 변하고 말았으며, 그 모든 상황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치루트는 이를 악물고 잡히는 것대로 모두 벽에 집어던졌다. ‘드드득소리를 내며 탁상 시계가 더욱 거슬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휴대전화를 찾아내자 이내 멈추고는, 누구에게 전화하려고 했던 것인지 조차도 잊은 채 떨리는 손으로 기억나는 번호를 눌러댔다. 그 마저도 흔들리는 몸과 흐린 앞이 방해를 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 하아.”

 

없는 번호…」

 

그는 휴대전화의 전화록을 간신히 찾아내 누구인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고, 개의치도 않았다제일 첫 번째에 등록되어 있는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사귄 친구들 중의 하나임에는 분명 했으니.

 

, 여보세요. 아침부터 웬일로, 치루트?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도와달라는 짧은 말 외에는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없었던 터에 그것만을 반복했다.

 

케인은 미리 사두는 게 좋겠다며 나름 농담이라는 실없는 이야기나 뱉었던 치루트가 진심으로 괜찮은 줄만 알았을 것이다. 거대한 구덩이를 작은 천 쪼가리로 덮어 숨기려는 발악이었을지 의심해본 이는 누가 있을까.

 

*

 



  넘쳐흐르는 생각이 고여 치루트의 방을 채워가고 있었다. 시력을 잃은 후 한동안은 기력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의 방을 다녀갔고, 더러는 눈물까지 흘리며 그의 앞에서 그를 동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는 창 밖에서 흔들리는 나무의 소리에 집중하느라 그들의 의미 없는 동정을 깊게 듣지 않았고, 눈이 보이지 않기에 그들과 시선을 맞추려 노력하지조차 않았다.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으며, 상상할 수 있었다.

그가 여태껏 해온 농담과는 달리 위안을 위해 떠올리는 생각이 아니었다.

 

어느 날 침대 헤드에 기대어 가만히 앉아있던 그는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시린 바람을 느꼈다. 눈을 뜨고 있었다면 그저 추웠을 바람이지만, 그 순간 그 바람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치루트는 곧장 자신의 옆에서 떠들어대던 누군가의 말을 끊었다.

 

친구, 부탁 하나만 해도 괜찮나? 구직 웹사이트에 글 하나만 올려줬으면 하는데.”

 

 

[작가의 조수 구함.]

 

하는 일: 작가가 하는 말을 토씨 하나도 바꾸지 말고 그대로받아 적는 것.

 

조건: 출근 시간은 꼬박꼬박 지킬 것. 밤샘 근무도 불평 없이 해낼 것.

 

초인종이 울린 후 문 여는 시간, 전화를 받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려도 불평하지 말 것.

 

작가의 말동무가 되어줄 것.

 

그리고 돈에 대한 문제는 일단 찾아오면 알려주겠다고 하고, 내 연락처도 적어줘. 고맙네. 아아, 그리고. 내 휴대전화 벨소리가 최대로 되어있는지 확인 해주고.”


저기, 치루트 선생님.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실 수 있나요?”

 

글쎄,”


치루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멋진 답을 언어의 무더기 속에서 뒤져내고 있었다. 맞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치루트는 미소 지었다. 그의 방문객 또한 미소로 답할 것이라고 제 멋대로 확정지어놓은 후에 말이다.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이 뭔지 알 수가 없으니 예전에 느껴봤던 익숙한 것들이 너무 아름답게 다가와서 말이지. 감탄하느라 두려울 시간을 찾을 수가 없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