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루트 현대 AU
[Timidness] W.by gulmang
추천하는 BGM
베이즈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짜증나도록 서늘한 방이 그를 한기로 꽉 감쌌다. 반 지하에 묻힌 방의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세상은 따분하고 회색 빛깔이 돌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발들이 그에 방에 비집고 들어오려던 햇볕까지 모두 차냈다. 베이즈는 답답한 세상에 갇혔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릴 정도로 이런 것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시계의 시침은 10과 11 사이에 걸려 있었다.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책꽂이에서는 꽤나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아 먼지가 쌓인 책들이 우두커니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날의 그가 사랑했던 소년이 주었던 다른 모든 것은 경솔한 마음으로 버려냈던 베이즈이지만 그가 한 권씩 빌려준 낡은 책들만은 그의 파편으로 남겨 자신의 일상으로 박혀 들어오도록 허했다.
출근까지는 시간도 남았으니 책이란 것을 다시 한 번 펼쳐 보고 싶어진 그는 책장에 꽂힌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검은 인조 가죽에 금색 글씨로 제목이 새겨져 있는 책을 빼내자 쪽지가 팔랑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베이즈는 뻐근한 몸을 아래로 낮추어 쪽지를 줍고는 소리 내어 읽었다.
“믿음을 따르자, 베이즈.”
그는 자신이 집어든 책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고는 어딘가 아파오는 느낌을 부정하며 헛웃음을 쳤다. 고개를 살짝 젓고는, 그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었다.
“성경이라, 최고의 소설이지.”
그 외에도 책들에 숨겨진 치루트의 조각은 많았다. 하나씩 모아갈 쯤에는 열두시가 다 되어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그를 보러 갈 시간이었다. 그와 베이즈의 집은 한 시간 가량 떨어진 거리라, 늦지 않으려면 그 시간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출근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바라보자 복잡한 거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머리 터지는 광경을 볼 필요는 없겠지.’
베이즈는 창백한 색이 번져버린 치루트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치루트는 예전과 다름없이 몽상가이리라 생각한 베이즈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이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은 그의 시간을 빨리 감았다. 어느덧 치루트의 가택을 지키고 있는 철 문 앞에 도착해 있게 된 그는 초인종을 울렸다.
“누가 오셨습니까?” 통화 장치로 묻는 목소리는 치루트의 것이 아닌 낯선 남자의 것이었다.
“시즈 브레이버맨입니다.”
약간의 의아함과 미묘한 질투가 뒤섞여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름마저 숨기고 용서조차 구하지 않은 채 돌아가려는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없다는 것은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문을 밀고 들어간 베이즈의 눈에 잘 꾸며진 정원이 들어왔다.
‘아까 그 남자가 해준 모양이군, 허.’
현관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집 안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가볍게 찍는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치루트는 오늘도 베이즈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그의 웃음은 안개꽃과 장미꽃의 다발 같아서, 한때 베이즈가 그 미소를 죽을 만큼 사랑했던 적이 있다.
“들어오세요, 브레이버맨 씨. 오늘 할 일이 많습니다.”
베이즈는 그에게 대답하며 그의 곁에 서있는 청년을 흘끔 쳐다보았다. 청년은 베이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어딘가 굳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선생님. 브레이버맨 씨, 치루트 선생님을 위해서 일에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하네요. 잘 도와드리세요.”
“아, 네.”
베이즈는 청년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치루트의 뒤를 따랐다.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친구는 유독 제게 신경을 많이 쓰는 제자라 제 옆을 몇 달 동안 지켰어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걱정되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받아 적는 사람일 뿐이지만, 임웨 당신이 어떤 글을 쓸 건지 알고 싶습니다.”
“좋아요, 앉아서 이야기 할까요?”
두 사람은 의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원했던 질문이 던져지자 신이 난 치루트는 그에게 이것저것 설명했다. 간혹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지만, 내용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베이즈는 그저 치루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입 꼬리가 잡아당겨져 그것을 쉽사리 가라앉힐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순수한 소년의 영혼은 치루트의 내면으로 숨어들어가지 않았다. 치루트는 베이즈가 숨겨두었던 소년을 끌어내 그 시간의 모양대로 위에 덧씌웠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붙잡는 것은 베이즈의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나간 시간이 다시 걸어와 그의 품에 고스란히 안기는 것은 굳이 밀어내지 않았다.
***
저녁 때가되었다. 브레이버맨은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얼마 못 했지만 그와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아주 값졌다.
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완벽한 친구가 될 것만 같았다. 신이 내게 그렇게 말해 주는 듯 했다. 나는 브레이버맨이 자리를 떠난 후에도 어둠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향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빛과 어둠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감사할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브레이버맨, 그의 얼굴을 알고 싶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깊은 곳들도 알아가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가 아는 사람을 닮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분하게 들릴만한 나의 이야기들을 그냥 잘라서 내버리지 않고 들어주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내게서 글을 쓰는 것을 배우던 나의 제자 몇이나 집중해서 들었지, 책과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조차도 그 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꺼렸음에도 브레이버맨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준 듯 했다. 그의 행동은 그리운 나의 청년기를 떠오르게 했다.
나는 그것이 그저 내가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차리는 예의가 아니기를 바랐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의 남자 주인공 브레이버맨과 이름은 같지만 아주 달랐다. 영화의 브레이버맨은 사려 깊지도 않았고, 제멋대로였으며, 자신의 애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떠나가기에는 브레이버맨을 너무 사랑했던 애인은 어떻게든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임을 깨닫게 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그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가 브레이버맨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신을 사랑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던 장면이 있었다. 브레이버맨은 자신을 밀쳐내고, 저주하는 애인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거짓 사과로 그녀를 달랬다. 그녀는 그저 입에 발린 말일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눈을 감아준다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영화에서는 흔한 전개가 아닌가?
그 장면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베이즈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때면 항상 심장 깊은 곳으로부터 아려오더니 그 감각이 피와 섞여 이내 피가 도는 모든 곳을 아프게 만들었다.
베이즈가 나에게 그러한 용서를 빌었다면 나라도 가엾은 브레이버맨의 애인처럼 하염없이 울기만 하며 금방 떠나갈 것이 두려워 그를 두 팔로 잠가 가두었을 것이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점차 닳아가며 그와 나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불안함은 오직 나만의 것이 되어갔고, 그가 붙잡아주길 원하면서 등을 돌리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결국 돌아보기 일쑤였다.
푸른 사랑은 누군가 뜯어낸 것도 아닌데 점점 떨어져 낙엽이 띄는 갈색으로 말라붙었다.
나는 모든 것을 떨어뜨린 그 이후로 여름을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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