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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재정비 중*

[베이즈X치루트] timidness(3)

베이루트 현대 AU


[Timidness] W.by gulmang




이번 편의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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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다시피, 저는 맹인이라 제 힘으로 변변한 대접을 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찾아와 주셨는데 차린 것이 없어 죄송합니다.”


  치루트는 베이즈에게 앉으라 일러주고는 손을 뻗어 자신이 앉을 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손으로 훑어보았다. 앉기도 부담스러울 만큼 고급스러워보이는 의자였다. 치루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베이즈에게 물었다.

 

제가 지금 브레이버맨 씨와 똑바로 마주앉아 있습니까?”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건가요.”

 

"대화의 기본은 바른 자세라 배워 왔으니 그렇습니다. 시선도 맞추어야 하는데, , 저는 완벽한 대화의 기본을 지킬 수가 없군요! “

 

  치루트는 나지막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다 장난스러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소리 내어 웃었다. 베이즈는 아무 말 없이 치루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배운 곧이곧대로 행동하는 고지식한 면도, 분위기를 가라앉히지 않기 위해 내놓는 실없는 농담도. 하지만 그가 입을 다문 이유를 알 리가 만무한 치루트는 그 침묵이 당황스러움으로 인해서 우러나오는 줄로만 알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줘요.”

 

,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아닙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싶어서.”

 

난 괜찮아요, 브레이버맨 씨.”

 

베이즈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척 하며 머뭇거리곤 실수하지 않도록 천천히 낯선 이름을 내뱉었다. “시즈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처음부터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익숙하질 않은 터라.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글에 적혀있던 건 다 읽어봤죠?”


베이즈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그가 제 행동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옷이 쓸려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답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한 치루트는 띄운 미소를 여전히 거두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럼, 시즈. 받아 적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진심을 다해주겠어요? 저에게는 글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 존재이기에 써내려가면서 사소한 것 까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조건들은 그저 장식 정도에 그칠 뿐이었지요.”


  베이즈는 허허,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히 이야기 한다면, 그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무언가에 진정으로 매달려 본 적이 없기에 치루트가 방금 한 말은 그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진심이 없이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 될 질문이지만, 사람은 언제나 좋은 쪽, 혹은 나쁜 쪽으로라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치루트는 새로운 인연을 맺은 기념이라는 이유로 베이즈를 붙잡아 두고어차피 일찍 가야할 이유도 없었던 베이즈이다글에 대한 신념,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의 명대사 따위의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베이즈는 오랜만의 나긋한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 중에서 고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에, 그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한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한 아픔에 갇혀있었던 여자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며 여러 가지 감탄을 섞어가며 영화를 극찬했다.

 

그런데 말이죠, 브레이버맨 씨. 전 당신 이름을 처음 듣자마자 너무 놀랐습니다. 그 영화의 남자 주인공 이름도 브레이버맨이니까요.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이렇게 편하게 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굉장한 우연의 일치입니다.”

식은땀이 척추를 가볍게 치며 굴러 내려가는 것이 하나하나 베이즈에게 느껴지는 듯 했다.

 

“잠시만, 미안합니다, 임웨. 생각해보니 제가 현관문을 제대로 잠가놓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은 이만 자리를 떠야겠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치루트가 케인을 잡고 일어서려 하자 베이즈는 그를 억지로 앉히며 배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며 말리고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내일은 오후 한시 까지 찾아와 주셔야 합니다.” 치루트는 가까이 다가온 베이즈의 팔에 손을 얹고 점점 쓸어내려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만나요.”

 

 

***




  생각할 거리가 수만 가지였다. 내 몸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만한 내 딱딱한 침대위에 풀썩 쓰러졌다.

 

  그와 갈라선 뒤 한동안은 나는 죽은 후에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국으로 올라가고,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 중간의 지점에서 순간 눈빛이라도 마주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애초에 신을 배반한 그 순간부터 나는 천국과 지옥 둘 중 하나를 택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과거 우리가 조심스럽게 키워낸 관계의 나무에서 본디 열려야 할 것은 선악과가 아닌 깨어지지 않을 우정의 결실이었다. 결실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착각한 채로, 소년이었던 그와 나는 한 입씩 그것을 씹어 삼키고서는 아주 달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 미사 시간에 들었던 사랑과 비슷한 맛이 있다면 그런 맛이지 않을까, 어린 나는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열매가 더 크고, 더 탐스럽게 자라나기를 바라며 욕심을 부렸다. 내 마음은 단 맛을 보고나서야 배고픔을 배운 모양이었다.

 

  허기에 눈을 뜨고 난 후 열 번 정도 사계가 바뀌어갔을 때쯤에, 나는 그에게 끔찍한 짓을 하기를 반복했다. 그가 여전히 내 곁에 있을 때도, 멀리 찢어져버린 후에도 네게서 떠나가고 싶지 않으니 이제는 그만 둬 달라고 말하는 애원의 목소리가 한 순간도 빠짐없이 들려오고는 했지만, 무거워진 죄책감을 다시는 바라보기 싫어, 나는 돌아선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를 상상하는 일 조차 오랫동안 외면했다.

 

  내 눈 앞에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천천히 걸어갔던 그 남자에게는 어렸던 나의 그에게서 그대로 가지고 온 여유롭고 온화한 얼굴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남자가 시즈 브레이버맨이 아닌 베이즈 맬버스라는 것을 알았다면 저 얼굴을 다시 내게 보였을까?

 

시즈 브레이버맨이니 괜찮다. 베이즈가 아니어서 괜찮다. 나는 그를 죄책감 없이 바라보아도 괜찮다.

 

나는 겨우 찾아온 참회의 앞에서 또 다시 예전의 내 이기적인 방식대로 생각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