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은 등이 무거워 걸음을 느리게 옮겼다. 옷가지들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둔 배낭 탓을 괜히 하다가, 그만두었다. 제 등이, 아니, 제 몸이 무거운 이유를 끔찍하게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 황량, 하고 조용히 부르는 차분한 음성이 들려 끙끙대며 고개를 돌리자 가장 사랑하는 인영이 어둠 가운데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옷자락이 흔들리는 모습이 언뜻 작은 빛에 비춰져 보였다. 그 모습이 밤바다의 파도만큼이나 유연하고 우아했다. 황량, 한 번 더 불리자 그는 대답을 대신해 몸을 완전히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이 밤에 어디 가고 있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피해서 갑니다.
불쑥 튀어나오려는 말을 황급하게 막고, 그는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 복잡한 머릿속을 뒤적거렸다.
“아, 사부님. 본가에서 급히 와보라고 불러서 돌아가려는 중이었습니다.”
“그렇니, 챙긴 짐을 보니 본가가 먼 것 같구나.”
황량은 엽문의 얼굴에 빠르고 부드럽게 퍼지는 미소를 예전처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스승께 사사로운 감정을 품은 제자는 용서를 청할 용기가 없었다. 작게 끄덕거리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황량은 배낭을 고쳐맸다. 고개를 바닥 쪽으로 향하니 콧잔등까지 차올라있던 울음이 갑작스레 툭툭 떨어졌다.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하는 황량을 바라보던 엽문은 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느냐고 묻는 잔인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황량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엽문은 붙잡지 못했다. 그렇다고 잘 떠나가라 말하지도 못했다.
*
“사부님.”
엽문은 해가 억지로 가라앉혀지지 않으려 땅을 붙잡고 남기는 마지막 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불어져 나오는 연기 또한 주황색으로 물들어서 잔잔히 바람에 날려갔다. 매캐한 냄새가 황량에게로 몰려왔다. 고결한 뒷모습에는 아편마저도 어울렸다. 정신을 다른 데에 판 사이 아편의 연기를 크게 들이 마셔버린 그는 두어 번 기침소리를 냈다.
“황량, 노을 색이 예쁘구나. 그렇지?”
그렇네요,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 몽롱했다. 엽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제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서둘러 아편 개피에 붙어있던 불씨를 꺼뜨리고 황량에게로 다가갔다.
“황량? 미안하구나. 연기가 그 쪽으로 날려가는 지 몰랐다.”
황량이 정신을 차리려고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원체 엽문이 아편을 피울 때는 가까이 다가가 본 적이 없는 그이기에 그렇게 많지도 않은 연기에 머리가 흐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황량이 무너지듯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엽문은 안절부절 못하며 그의 뺨을 약하게 두드려보기도 하고, 이마를 맞대고 눈이 풀려버렸는지 살펴보았다. 제정신을 차려 맞닿은 이마가 누구의 것인지 알게 되자 황량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뒤로 뺐다.
“아, 아니오. 저…. 사부님, 어깨는 놔 주셔도 괜찮아요.”
“얼굴이 붉단다, 황량. 어쩌면 좋나…. 미안하다. 네가 아직 안 돌아갔을 줄 모르고 피우고 있었다.”
짓궂게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얼굴이 황량에게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조금만 더 정신 못 차리는 척 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황량은 생각하고 눈을 겨우 끔뻑이는 척 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 순간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모든 것을 아편 핑계로 덮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황량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다 아편 탓이야, 다 사부님이 피우신 아편 탓이야… 황량은 손을 뻗어 엽문의 뒷머리를 끌어 당겼다. 그렇게 하고는, 입술을 꽉 눌러 포갰다. 엽문의 몸이 가만히 얼어버렸다.
“황량, 황량?”
황량의 정신이 번뜩 돌아왔다. 엽문은 혼이 나가 멍하니 그의 이름만을 읊조렸다. 눈앞이 거꾸로 돌았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훅 끼치는 단내를 맡은 어린아이처럼 군것도, 가끔씩 굳이 저의 입이 닿은 찻잔을 나누기를 청했던 것도, 이유가 있었다는 말인가? 영춘권의 일대종사 엽개문이 지금 얼어있는 것과 같은 이유가?
“세상에. 제가 무슨 짓을.”
“아니, 아니다. 괜찮아. 실수지? 안다. 일단 따라 오너라, 열을 식혀야 하니까 물수건이라도 얹어주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옥상을 나섰다.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엽문에게도, 황량에게도. 도망갈 수도, 무조건 따라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무어라 궤변이라도 늘어놓으려고 입을 열던 황량은 엽문의 질문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황량, 아까 내 얼굴을 끌어당길 때 힘을 제대로 주더구나.”
“…”
“그 때 아편에 취한 것이 만약 아니라면. 나를, 단순한 의미로만 흠모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사랑합니다.”
엽문의 얼굴에 빠르고 부드럽게 미소가 번졌다. 나를 사랑하는 거구나, 황량. 그는 그렇게, 웃기만 했다. 제 곁에 머물라 말하지도, 떠나가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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