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아날로그의 대는 이미 21세기 초에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 시대가 점점 후반부로 접어들었을 땐 종이와 연필 따위의 물건들은 물론 인간의 팔, 다리와 같은 신체부위들도 기계적인 것으로 대체되었고, 그래서 23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문헌에는 ‘수동적’인 것을 버림으로서 21세기가 인간의 일곱 번째 진화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남아있었다. 아날로그는 21세기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제임스 T. 커크가 말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맥코이가 생각하기에는, 커크는 그런 말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기야 했다. 그는 알레르기 때문에, 23세기,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겨우 골동품으로나 취급되는 안경을 잘도 콧등에 걸치고 있었다. 그의 경우처럼 시력을 보조하는 렌즈 삽입이 불가능한 사례는 드물었다. 커크는 언제나 자신이 과거처럼 살 수 있도록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에 들어서는 거의 행해지지 않는 ‘시력 검사’를 받을 때마다 눈 관리나 하라는 자신의 꾸지람을 어물쩍 넘어가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맥코이는 여겼다.
엉뚱한 소리라고 대충 받아넘기고는 했지만 사실 맥코이는 과거의 문물이 덜떨어지고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도 관심이 가는 것을 하나 짚어보자면 만년필이라는 물건이었다. 옛 것이라 다루기 번거로운 장치이기는 했지만, 종이―과거의 것과는 성분이 다른 모조품이었다―에 끝이 닿으면 사각사각 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글씨가 그려졌다. 패드는 두드려봤자 삭막한 유리에 손가락이 톡톡 부딪히는 소리가 날 뿐이었으니 당연히 만년필을 처음 접했을 때는 꽤나 충격이었다. 글씨를 입력하는 것이 아닌 그려내는 구시대적인 방식이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경험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었다. 그럴 때면 맥코이는 무조건 옛 것을 미개하게 여기고 ‘갈아 치워버린’ 21세기의 사람들에게 의문이 들었다.
*
맥코이는 한 번도 직접 만년필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날에는 그 핑계로 제임스 커크의 방에 들렀다. 퍽 소중한 듯 보이는 물건이라 허락을 맡고 사용하려고 했지만, 커크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한 글자 그려보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겠어. 그는 책상에 쌓여서 정리되어있는 종이를 조금 흩뜨려보았다. 가지런하게 둔 것을 보니 사용한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종이 더미 중에서 한 장을 집어 올려서 책상의 상판에 깔고, 그는 만년필을 쥐었다. 까맣고, 반들하게 빛이 비치는 우아한―맥코이는 물건에 아름답고 감성적인 표현을 붙여주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그 만년필을 앞에 두고서는 도저히 수식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필기구라니. 그가 뚜껑을 잡고 비틀었다가, 열리지 않자 당겼다. 낯선 물건인데도 똑바로 다룬 듯 했다. 한 번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만년필이 뾰족한 펜촉을 드러냈다. 잉크가 방울져 올라왔다. 종이에 그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경이로움에 웃었다.
맥코이가 날카로운 끝을 가져다대자 만년필은 종이에 검은 선을 입혔다. 쓸리는 소리가 바람소리처럼 시원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가 느끼고는 했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가 싶어서 알아보려는 요량으로 한 번 더 얇은 선을 새겼지만,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커크가 하던 대로 글씨를 그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쓸 게 뭐가 있다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 단어가 있었다.
그는 글씨 쓰기를 처음 배우는 ‘아날로그의 세대’의 어린아이처럼 더디고 서투르게 손을 움직였다. 패드를 두드리며 데이터를 입력하는 일만을 반복하는 손은 예술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굵기가 제멋대로인 글씨가 종이를 긁었다. 커크가 제 글씨라며 보여준 것과는 아주 달라서 한 글자씩 더 적을 때마다 남는 끔찍한 모양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
B, O, N, E, S.
본즈. 커크가 그를 부르는 이름을 적어내고 나서야 그는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았다. 그 공간에 제임스 커크가 부족했다.
안경을 쓰고, 만년필을 쥐고, 목제 책걸상에 몸을 걸친 채로 글씨를 그려내는 사내. 맥코이는 그 모습 자체에 황홀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낱 사각거리는 소리 따위가 아니라. 그럼 그렇지, 내가 그렇게 필기구 소리에 감동받는 감성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는 스스로가 과거의 물건에 애정을 가진 커크같은 괴짜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큰일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본즈’는 커크를 사랑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말았다. 커크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젠장, 역시 난 널 사랑해, 짐.
그는 삐뚤게 종이에 적고는 소리내서 웃었다.
짐본즈 쌍방사랑인데요 본즈가 자기가 정말 커크 좋아하는지 확신 못하고 있다가 자기가 정말 커크 좋아한다는 걸 느끼고 행복해하는 거에요
이 뒤에는 아마 고백을 하고 행복하게 살겠죠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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