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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문

[베이즈X치루트] 칼로 물 베기









담담하게 잔에 담긴 것을 홀짝거리는 소리가 베이즈 맬버스의 귓바퀴를 돌았다.



 

치루트, 내가 혼자서 커피 타 마시지 말랬을텐데. 뜨거운 물이잖아.”

맹인에게는 위험해, 입 밖으로 내려던 말에 다행히도 걸림쇠가 걸렸다. 아직까지도, 치루트 임웨의 세상이 캄캄하다는 것은 베이즈의 걱정거리였다. 한 순간도 눈을 떼서는 안 되었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치루트가 모든 것이 과보호라고 말할 때도 그는 염려가 끊이지를 않는 것을 어쩌겠냐고 몇 번을 받아쳤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찼던 모양이다.

 

나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뜨거운 물을 잔에 따르는 것쯤은 무리도 없어.”

 

치루트는 토라진 듯 베이즈를 쏘아붙이는 어투로 말을 하고는 한 번 더 잔을 입에 댄 채 천천히 기울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걱정 되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내가 하루 이틀 이렇게 산 것도 아니고. 베이즈, 걱정은 걱정에서 그쳐야 하는 거야. 험상궂게 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그 한 마디에 찬 물 한 양동이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베이즈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고, 스스로가 보기에도 저 편하자고 강행한 배려처럼 보이는 행동을 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몇 문장이 떠오르지만 도저히 할 말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 없었던 베이즈는 가만히 치루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단단히 엉켜버렸는지 말 몇 마디를 내뱉고 나서 치루트는 연신 홀짝거리는 소리만 내었다. 말 못하는 짐승들이 그렇듯 그는 화가 나면 입을 굳게 닫고 다리를 떨거나 바닥에 발을 굴렀다. 쿵쿵쿵쿵초당 한 번 꼴로 불만을 다리로 말하고 마는 모습이 베이즈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덩달아 불만스러워져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이 날은 조금 달랐다. 커피를 담고서 기울어지고 있는 잔을 보니, 분명 따뜻한 김이 풍겨야 할 텐데, 치루트의 콧등이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수증기에 가려져 있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늘 뜨거운 커피에서 풍기던 진한 향이 치루트의 주변에서 진동하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설마, 미지근한 물에 커피를 녹인 거야? 베이즈는 입술 사이에서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겨우 틀어막았다.

 

치루트는 김이 풍기는 모양이 보이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는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척, 미지근한 물에 가루로 가공되어 나온 커피를 녹여 내렸다. 무슨 가루를 탄 건지, 첫 번째 잔은 씁쓸하고 떫은맛이 나는 찻가루 베이즈가 커피를 마시는 치루트의 옆에 앉아서 마시던, 치루트가 싫어하는 차였다의 맛이 코를 찌르듯 풍겨 와서 개수대에 남김없이 버렸다. 가루의 향을 제대로 맡아 보고, 두 번째 잔을 만들어 냈을 때야 싱거운 한 잔 분량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고, 그 시점에서 그는 이미 베이즈에 대해서 곱씹다가 용서하게 되고 말았다.



네가 아무리 싸우는 데에 능숙한 맹인이라도 일상생활은 내 도움 없이 할 수 없을 걸.

그 때 치루트는 뻔뻔한 베이즈의 말에 우발적인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러고 나서 처음에는 그것이 무조건 베이즈의 잘못이라고 생각 했지만, 받아치느라 아무 생각 없이 뱉었을, 베이즈의 다시 떠날 거라는말이 길바닥의 돌부리처럼 툭 솟아올라, 그가 충동적인 저주를 할 때마다 발이 걸렸다.

 

그제 가서야 생각해보니, 베이즈가 없으면 그는 커피 한 잔도 제대로, 그리고 여유롭게 마실 수 없었다. 커피의 싱거운 향 정도야 참아낼 게 되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듣는 안정적이고, 과하지 않을 만큼만 무겁게 나는 목소리의 자리가 빈 것이 그렇게 심란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단 하루, 심지어 하루가 다 지나기조차 하지 않은 동틀 녘의 몇 분 동안인데도 그랬다. 창을 등진 채로 놓인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몸을 누이고, 그는 베이즈가 잠에서 깨어나 몇 마디를 던져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장난스러운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섞여서 그는 화난 것처럼 굴며 베이즈에게 골탕이나 먹일 작정이었다.

 

치루트가 바란 것과는 다르게 베이즈는 진땀을 빼기는커녕 온 얼굴에 웃음을 머금었다. 거봐, 내 도움이 없으면 이런 실없는 짓이나 하고 그런다니까, 들릴 듯 말 듯 중얼대고 베이즈는 치루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주 본 채로 놓인, 빈 안락의자 하나에 앉았다. 삐그덕대는 소리가 치루트에게 베이즈가 앉았다고 일러주었다.

 

치루트, 오늘은 하늘빛이 궁금하지 않아?”

 

베이즈, 오늘은 하늘빛이 어때


치루트가 묻는 말에 베이즈는 늘 군말 없이 대답해왔다. 도로 궁금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심으로 감동받았지만, 원래 마음먹은 대로 치루트는 잔 받침과 잔을 든 양손과 함께 고개를 홱 돌렸다. 애초에 뜨거웠던 적이 없어서 미지근해졌다고는 못 이를 커피 몇 방울이 치루트의 얼굴에 튀었다. 그가 뜨거운 체를 할 생각도 못하고 멀뚱히 멈췄다. 그러다가 두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려 방향을 하나 짚고 손을 내리려고 했다. 완전히 틀린 방향이었다. 물끄러미 무엇을 하나 지켜보기만 하던 베이즈는 그의 손목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고 끌어서 찻잔을 똑바로 탁상에 올려두도록 했다. 찻잔이 달그락거리며 굽을 탁상에 맞대는 소리가 들렸다.

 

베이즈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치루트의 볼을 문질러 커피가 남긴 얼룩을 닦아냈다.

혼자서 뜨거운 물 끓인 척은 다 하더니. 역시 사기꾼이지, 너는.”

 

몰라.”

 

아주 어른취급 받고 싶은 애구만, 치루트 임웨.”

 

베이즈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서, 닦아내던 볼을 잡아 늘렸다. 입까지 옆으로 잡아당겨져서 어눌해진 발음으로 무어라 이야기하려다가, 치루트는 웃었다. 베이즈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광대뼈가 아프고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가끔씩 그들은 그렇게 이유 없이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이번에는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못나게 찌그러진 얼굴이 사랑스럽다는 것이 될 수 있었다. 한참 웃다가, 알아듣지 못한 말에 대해 베이즈가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뭐라고?”

 

난 네가 없으면 하늘빛이 궁금해서 못 살아. 그러니까 다시 떠날 생각 말아.”

네 말은 내 눈이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치루트는 베이즈의 얼굴을 무작정 잡아당겨 어디에 그러는 지도 모른 채로 입 맞췄다. 평소보다 더 들떠서 소리 내어 웃는 베이즈 덕에 치루트 또한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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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하늘, 눈물, 커피"

커미션 샘플로 사용할 리퀘, 소재는 '더덕' 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업 기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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